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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 Writing Story/The Real Stories

엄마는 강해져야 했다

by Deborah 2021. 11. 2.

 

아들의 연주 동영상이 유튜브 떴다.

 

엄마는 강해져야 했다.

 

엄마는 어린 시절 만주로 피난 생활을 했고, 그 시절 부모를 먹여 살려야 했던 5살의 어린 나이에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영리하게 살아남았다. 그곳에서 엄마는 언어를 배우고 가족의 생계를 함께 책임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참 똑똑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만주 사변이 일어나고 엄마는 피난을 또 해야 했다. 피난길의 혹독한 생활을 기억하고 그녀의 자식에게 무용담으로 들려주기도 했다. 

 

엄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함께 살려고 했지만, 시집살이의 힘겨움에 못 견디어 친정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얼마나 혹독했길래 그랬을까? 오늘날 시어머니가 시집살이시킨다면 누가 함께 살자고 했을까. 하지만 그 시대는 여자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참고 살아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을 하게 된 엄마는 친정집에서도 구박덩어리가 되었다. 친정아버지는 엄마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지만, 친정 엄마는 새로운 선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만나게 된 사연은 대충 이러했다. 엄마의 얼굴도 보지 않고 아버지는 엄마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그냥 순종적이고 자신의 왕국을 잘 따라와 줄 그런 여자를 원했다. 아무도 아버지의 고약한 성격을 인정하지 않았고 어떤 여자는 심지어 한 달을 살다가 도망을 간 일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정도로 소문이 자자한 그의 전력에 어떤 여자가 시집을 올까 했지만, 결국 아버지는 로또에 당첨된 사람 마냥 엄마를 맞이 했다.

 

혼인 첫날밤 보내고 생긴 아기가 큰언니 었다. 큰언니는 엄마의 똑똑한 두뇌와 아버지의 냉점함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최고의 걸작품이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그 당시 언니를 무척 예뻐했다. 언니의 이름은 남자 이름이었다. 옛날 남자 이름을 지으면 다음에 낳는 아이는 남자가 될 확률이 많다는 근거 없는 소문에 우리 어머니도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서 가족의 동의하에 할아버지가 지은 이름은 남자 이름이 되었다. 다들 언니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름만 보면 남자인 줄 알았다.

 

억울하게 남자 이름을 이어받은 큰언니는 집안의 보배였다. 언니는 자라면서 인물도 출중하고 머리는 비상하여 전교의 1등 2등의 자리를 오고 가면서 아버지의 자랑이자 큰 기쁨이 되어 주었다. 언니가 4살 때 오빠가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녀의 특출함 때문에 오빠는 늘 비교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모든 결정은 아버지의 몫이었지만, 영리한 엄마의 조언에 큰 도움을 받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는 엄마의 비상한 머리를 따라잡지 못했다. 늘 여자라고 무시했지만 엄마는 그럴수록 더 강해져야 했다. 엄마가 아버지의 구타를 받고 있을 당시는 막내를 임신했을 때였다. 그때도 엄마는 강해져야 했고, 옛 부인을 잊지 못해 찾아온 전 남편을 돌려보낼 때도 이를 악물고 버티어야 했다.

 

엄마는 그렇게  살아남지 않으면 우리를 키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구타에도 참고 시어머니의 모욕적인 말에도 참아 내야 했다. 그 수많은 수난의 시대가 지나고, 할머니가 더 이상 기력을 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당시도 엄마는 극진히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동네 사람은 엄마의 충심을 다해 시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에 감탄을 했다. 그렇게 엄마를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의 죽음을 보게 되었다.

 

그 당시, 필자의 나이는 중학생이었고 할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냥 누워 계시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 장례식에 분주히 돌아다니고 울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난 울지 않았다.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독한 년.. 할머니 돌아가셨는데 왜 울지 않는 거야?"

내가 꼭 울어야 하는 이유를 그 당시 알지 못했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울어야 하나 하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엄마가 다가와서 한 마디를 했다.

"할머니 지금 가시면 이제 안 온다. 그러니 가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오렴. 울지 않아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 보는 눈이 있으니 그냥 우는 흉내라도 내고 오렴."

엄마는 내가 왜 울지 않는지 묻지 않았다. 그냥 가서 우는 척이라도 하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우는 척하느라 큰 소리로 고함만 질렀던 지난 기억의 건너편에서 생각했다. 왜 그 당시 울지 않았지? 스스로 자문을 해본다. 아 그랬구나. 엄마를 그렇게 구박하시고 잔소리를 해대는 할머니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한 없이 밉고 야속했구나.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엄마는 더 강해져야 했다.

내가 세상의 절망의 강을 건너갈 때쯤 엄마는 울고 나를 살리기 위한 모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믿음이 없던 엄마는 둘째 딸을 살리겠다고 교회의 문턱이 닳도록 방문하고 기도를 했다. 엄마는 글을 읽을 줄을 몰랐다. 그런 엄마가 성경 책을 읽기 시작했다. 놀라운 변화에 모든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매일 날마다 찬송가를 집이 떠나가도록 부르고 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의 인내심이 하늘에 달하여 제사상을 뒤집어엎어 버렸다. 엄마는 찬송가를 부르고 아버지는 제사를 지내는 이상한 풍경에 아버지는 참다못해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

그 후로 아버지는 어머니의 교화 작전에도 꿈적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몰래 신을 섬기고 그림을 그리면서 신이라고 생각하고 숭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림 솜씨가 참 좋았다. 어릴 적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나의 모습을 보던 아버지는 분노했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아 그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딸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핏줄은 못 속인다는 말이 맞았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미대를 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아버지는 혼자서 신을 섬기고 그렇게 평화로운 생활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노세 하신 아버지는 마지막 6개월을 방에 누워 지내야 했다. 그 힘든 병수발을 하고 지극히 아내의 도리를 다했던 엄마는 그 당시 강해져야 했다. 아버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라 생각했다. 마지막 가는 그 길을 편안히 보내 주고 싶었던 그녀는 목사님을 집에 초대하고 구원의 기도를 하자, 아버지는 그 순간 하나님을 받아 드렸다. 다들 아버지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했고 어떤 이는 그냥 마지못해 예수를 영접을 한 것이 아니냐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 어머니는 평생을 강해져야 하는 인물로 우리 남매를 지켜보고 늘 함께 해줄 것 같았다. 그런 어머니가... 이제는 요양원에서 자식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어제 전화를 했더니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나는 울면서 전화 통화를 했다.

"엄마.. 엄마 들려?"

"누구냐?"

"응 경화야.. 엄마 딸 경화.. 지금 미국에 있는..."

"누구?"

"경화라고..."

"아.. 경화구나..."

이 말을 하시고는 요양원의 도우미 아주머니와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엄마는 나와 통화를 한다는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온 전화라는 사실도 몰랐다. ㅠㅠ 예전 같으면 둘째 딸의 전화를 가장 우선적으로 받아 주고 늘 기쁜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해 주었던 그 엄마는 없었다. 그렇게 강하게 나의 성을 지켜 주었던 장군 같이 강한 그런 엄마는 없었다. 그래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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