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85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9- 고요했던 내 마음에 다시 파도가 일었다.한동안 잠잠해졌다고 믿었던 감정들이, 어느새 깊은 바다 밑에서 밀려 올라와 나를 삼키고 있었다. 그 파도의 중심에는 진영이 서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닿을 수 없는 사람처럼 멀게 느껴지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선명한 존재로. 눈을 뜨자 아침 햇살이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어젯밤 마음속을 휘몰아치던 폭풍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온한 아침이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흘러가고 있었다. 급하게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말리던 순간, 문득 민석과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곱창집에서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복잡해질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제는 회사에서 매일 얼굴을 봐야 한다.. 2026. 5. 13.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8- 진영을 혼자 남겨두고 돌아서는 길은 밤공기보다 더 차갑고 사늘했다.마치 오래 묻어 두었던 감정들이 다시 깨어나 내 몸을 휘감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잊지 못했던 걸까. 속으로 애타게 그리워하던 사람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오히려 내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복잡하게 엉켜버린 생각들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석이었다. 민석은 나를 바라보며,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가까운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이상할 만큼 멀게 느껴졌다. 그때 민석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누나…”하지만 나는 듣지 못했다.머릿속이 온통 진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누나.”“아… 미안.”“누.. 2026. 5. 12.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7- 곧 둘만 남겨진 공간.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웨이터가 다가오자 진영은 와인을 주문했다. 붉은 와인이 잔에 천천히 채워졌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아직 무엇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사람들처럼 조용히 잔을 들었다.빈속에 마신 와인은 생각보다 빠르게 취기를 올렸다.하지만 알코올조차 이 묘한 긴장감을 지우진 못했다.진영은 집요할 만큼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민혜리 씨. 반가워요.”“네. 박진영 이사님. 반갑습니다.”“우리 만나보면 어때요?”나는 피식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이사님. 전 여기 디자인 일 때문에 온 겁니다. 선 보러 온 게 아니에요.”“민혜리 씨…” 그의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가슴을 파고들었다.마치 10년 전 그리움 속에 멈춰 있던 사람처럼. “정말 우리… 모르는 사이 맞습니까?”.. 2026. 5. 10.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6- 우리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마치 초를 세듯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흐르는 시간 위에 서 있는 나는 자꾸만 그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 큰 키에 잘 다듬어진 비즈니스맨의 분위기,날카로운 턱선과 오뚝한 콧날까지. 짧은 대화였지만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이제 다 끝난 일이야.그냥 일일 뿐이야.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다시 볼 일도 없을 거야.’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려던 순간이었다.나도 모르게 손이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짧은 신호음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차가운 공기를 감싸며따뜻한 온기처럼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디자인을 맡게 된 민혜리라고 합니다.”“반가워요. 박진영입니다.”“그런데.. 2026. 5. 9.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5- 그녀를 만나기 전, 내 세상은 흑백이었다.의미 없이 반복되는 하루와 감정 없는 시간들.그저 살아내는 것에 가까운 단조로운 일상이었다. 친구와 함께 입사한 회사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다. 햇살 아래 번지던 그녀의 미소는 눈부실 만큼 아름다웠고,나는 그 미소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심장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내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나는 애써 감정을 숨겼다.좋아한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친구를 향해 웃는 그녀를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그녀를 뒤로한 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그 순간 처음으로 희미한 희망이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그녀 앞에서의 나는 늘 서툴렀다.말 한마디를 건네기 위해 수십 번을 망설였고.. 2026. 5. 8.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4- 멈춰 있던 나와 그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안과 그리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뒤엉켜 자꾸 입 밖으로 흘러나오려 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삼켰다.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가 ‘운명’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결국 만나야 할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을. 진영은 내 마음 속에서 빛과 같았다.내 청춘이라는 캔버스 위에, 화려함과 우울함을 동시에 그려 넣은 사람이었다. 그가 없던 10년은 어땠을까.그저 무감각이었다. 살아야 해서 살았고, 버텨야 해서 버텼다.일에 매달린 끝에 회사에서 ‘대리’라는 직책도 얻었다.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능을 증명하듯 미술 디자인과를 졸업했고, 나름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였다.내 삶은 충분히 완벽하다고 믿었다.그를 다시 .. 2026. 5. 6.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3- 그와 나눈 대화 중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말이 아니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보이지 않는 무언의 표현들이 그의 온몸을 통해 전해졌다. “나, 너 정말 좋아해.” 그는 그 말을 직접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나만을 위해 고른 것 같은 언어들로 내 마음을 다독였고,내 안에 단단히 쌓여 있던 사랑의 벽을 하나씩 허물기 시작했다. 그의 말들은 모두 사랑을 향해 있었고,그 따뜻한 언어들은 어느 순간 화살처럼 내 마음에 꽂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감정들이 내 안에 쌓여가던 그날,우리는 평범한 연인들처럼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내 눈을 바라봤다. “왜 그래? 잘 못 먹네.”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응… 음.. 2026. 5. 4.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2- 그날 나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을까.그의 얼굴 표정은 또 어땠을까. 내 기억 속 그의 모습은, 단정하게 짧게 자른 곱슬머리와 멀대처럼 큰 키였다.시장 안의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치 오래된 고목나무처럼 우뚝 서 있던 모습.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나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가는 데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우리 사이의 간격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나는 괜히 손을 어딘가에 올려보았다가 내렸다가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은불쾌함이 아니라, 마치 엄마 몰래 사탕을 훔쳐 먹은 다섯 살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그 사랑스러운 표정과나를 향해 있는 그의 모든 몸짓을 알아차린 순간,내 마음은 오히려 아파왔다. 어떻게 하면이 관계를 세상에서 가장.. 2026. 5. 3.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1- 그의 검은 테 안경 너머로 비치던 맑고 영롱한 눈빛이나를 향해 빛나듯 속삭이던 그 말은밤새도록 메아리처럼 남아, 결국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그랬다.그 순간, 젊음과 청춘이 흐르던 그 자리에는내가 사랑했었던 남자의 베스트 프렌드가 서 있었다.마치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그를 나에게 보내준 선물처럼 느껴졌던 것은 왜였을까.아마도 그것은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하나의 답처럼 받아들이고 싶었던나 스스로의 위로였는지도 모른다.그렇게 수많은 시간을 지나오며,어느 순간부터 그의 모습은낯설게도 다정하고,믿기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우리의 데이트는 그렇게 시작되었지만,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그저 그의 입술을 통해 전해지는 말들 속에서내 마음이 천천히,마치 녹아들 듯이그의 마음.. 2026. 5. 2. 이전 1 2 3 4 ···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