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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ing in America

용서하기 어려운 큰 동서

by Deborah 2008. 10. 19.

우리 시댁에는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큰 형이 인터넷을 통해서 외도하고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바람을 피운 그녀와 재혼을 하게 됩니다. 처음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큰 동서는 당시 시 아주버님과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서로 동거를 하는 상태였습니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난 후에 만난 그녀를 보면서 많은 감정이 오고 갔습니다.
사실 말이 큰 동서이지 외국에는 큰 동서라는 이미지 자체가 없는 듯합니다. 적어도 저의 시댁은 그랬습니다.

큰 동서는 캐나다에서 왔습니다. 그녀는 자식도 버리고 시 아주버님을 따라서 미국까지 온 것이랍니다.
지금은 알라바마에서 자리를 잡고 직장도 가지고 있으며 집과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보였습니다.
이제는 안정적이기만 한 직장을 포기하고 루이지애나로 이사하여야 할 상황이 생겼습니다.
이유인즉슨, 시 아주버님이 양육권 문제를 놓고 소송을 걸었는데 결과가 나오기를 양육에 관한 모든 것에 관여할 수 있고 아이들을 일주일을 번갈아 가면서 집에서 데리고 있을 수 있다고 판결이 나왔습니다.
소송 판결은 좋게 나왔으나, 정든 집을 내 놓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여야 하는 상황인데다, 루이지애나에다 직장을 내년 1월까지 구해야 한다고 법정 판결에 나왔습니다. 요즘 불경기에 직장 구하기는 참 어려운데 어떻게 될지도 의문입니다.

시 아주버님과 친하게 지내는 새로 온 큰 동서를 보면서 마음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큰 동서는 가정을 파괴한 장본인이고 그런 그녀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지요.
사실 보면 그녀가 택한 삶이 치러야 할 댓가도 엄청난 것인데,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남겨준 당사자이다 보니 우리 시댁에서는 그녀를 아직 식구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요. 그런 가운데, 남편이 형님을 찾아서 이곳 알라바마까지 온 것이랍니다. 큰 동서에 대한 미움이 큰 것도 옛 동서가 그리워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큰 동서와의 만남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필자에게 남편이 다가와서 한 말이 생각이 납니다.

"예전에 그들이 저지른 행위를 판단하기 보다는 지금 바르게 살려고 하는 그들을 격려해 주고 두 번 다시는 그런 길을 걷지 않도록 해 줘야 하는 것이 바른 자세라고 생각해. 물론 어렵겠지만, 그들을 용서하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용서를 하라는 말에 마음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용서라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용서라는 것은 이해를 넘어섰을 때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이해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이 용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 사람을 미워하기는 쉽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주위에 미워하고 용서해야 할 상대가 있나요?
그렇다면, 마음은 힘들겠지만, 그 사람 위치 놓고 그 사람을 이해하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힘들겠지요. 지금 저도 이렇게 힘든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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