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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ing in America/Living in North Carolina

내가 기억하는 그는...

by Deborah 2020. 8. 26.

2013년 10월. 이 작품은 300불을 값어치가 있었던 예술품이지만.

필자가 그린 그림 중에서 유독 가족과 연관된 그림이다.

위의 작품은 현재 하와이 계신 지인 소장하고 계신다.

 


 

 

 

 

아티스트: 홀랜드

노래 제목: 네버랜드

 

 

 

그를 처음 봤을 때는 그냥 너무 상냥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다른 분들은 그와 대화하기를 꺼려하고 마치 오염물을 피하듯 필자에게도 암시적 표현으로 눈치를 주셨던 기억이 난다. 혹시 호모 포피아 성향이 있으신 분이라면 글의 창을 닫고 가셔도 된다.

 

처음 만남

시어머님 장례식 때 만났던 남편의 삼촌은 자상하고 나한테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 사람이다 보니, 다른 식구들과  소외되고 있는 모습이 보였던 모양이다. 이런 작은 것에서부터 식사를 챙겨 준다거나 잔잔하게 좋은 인상의 삼촌으로 다가왔다. 그런 나의 생각과는 달리 큰 형님은 나를 따로 부르시고 경고의 말을 하셨다.

 

 

형님: "절대 아들과 삼촌 둘이 두면 안돼요."

필자: "왜요?"

형님: "삼촌이 남자를 좋아하는데 아이들도 좋아할지도 모르잖아요."

필자: "헉.. 그게 무슨 말씀? 이야기해보니 안 그렇던데요?"

형님: "동서는 그냥 내가 시키는 데로 해요. 삼촌하고 가까이 지내봐야 좋을 것 없어요."

필자: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데? "

형님: "뭐가 이해가 안 간다는 건지??"

필자: "아니 말이 안 되잖아요. 다 큰 성인이 조카를 해코지라도 한다는 듯이 말하셨잖아요."

형님: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아이들 보호하자는 거지."

필자: "음.. 뭘 보호하자는 말씀인지??"

형님: "동서는 한국에서 와서 모르는구나."

필자: "한국에서 왔어도 알건 알아요. 저도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도 알고요."

형님: "그런데도 삼촌 편을 든다는 거야?"

필자: "삼촌 편을 드는 게 아니라..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지잖아요."

형님: "동서하고는 말이 안 통하네. 난 몰라.. 자네한테 경고했어. 혹시 아들이 당해도 날 원망치 말어."

필자: "음.. 형님.. 말씀이 너무 지나치세요."

이렇게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 대화를 한 기억이 난다. 그 당시는 추억이라고 끄집어내기에도 부끄러운 일들이 가득한 장례식장이었다. 어머님이 원하시는 건 이런 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닐 텐데. 형님은 불쾌한 대화를 하셨다. 그 후로 형님과는 조금의 거리를 두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형님 집에 머물게 되는 사연이 있었고, 그 당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올 때였던 거 같다. 같이 살면서 형님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필자를 디스를 하셨던 일도 기억나며, 사이좋게 지냈던 시아주버님과 의 관계를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 것도 기억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이라면, 왜 나는 이런 차별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나로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문득 자상하게 나를 대해주시던 삼촌이 기억이 났다. 남편께 물어봤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남편 말로는 아무도 삼촌은 신경 쓰지 않고 내놓은 자식 마냥 삼촌은 세상에 버려졌다. ㅠㅠ 그런 일이 있고 세월이 흐른다.

 

두 번째 만남

삼촌은 나이도 많이 들었는지 흰머리도 보였다. 여전히 나를 기억해주고 서양 사람들이 발음하기 힘들다던 나의 이름 석자를 불러 주었다. 그리고 삼촌은 우리 가족을 집으로 초대하셨다. 물론 남편은 불편함을 어찌 표현할 수도 없었다. 남편은 그 당시 군목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상태로 삼촌의 성적 성향에 대해서 반기를 들지만 삼촌이 결정 내리신 부분이라 뭐라 말을 못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삼촌 집으로 갈 때 이야기를 나누었다. 삼촌을 보면 어떻게 할 건지..

 

"삼촌은 지금 어디에 살아?"

"응 삼촌 애인하고 동거 한데."

"그럼 남자겠네?"

"응"

간단하게 응 라고 하는 그 말에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마침내 삼촌 집에 도착하고 하룻밤을 머물다 갔다. 삼촌은 여전히 나를 공주처럼 대접해주셨고 너무 큰 환대를 받아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에 긴 침묵이 흘렀고 우리는 생각이 통한 듯이 말했다.

 

"기도하자. 우리가 할 일인 것 같아."

그렇다. 지금도 여전히 마음에는 삼촌이 있다. 기도 제목이고 삼촌의 삶의 선택을 하면서 힘들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임을 알기에 그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믿음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듯이 우리의 생각과 믿음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하나님만 아시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삼촌과 아들 내외

 

 

 

세 번째 만남

시아버님 부고 소식을 접하고 찾아오신 삼촌이다. 즉 시아버님은 삼촌의 형이다. 그러니 마음이 얼마나 무너져 내렸을까. 옆에 가서 안아 드렸다. 울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파 온다. 평생 삼촌의 형은 가족으로 받아 주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죽기 몇 년 전부터 왕래하면서 서로 가족으로 받아 주었다고 한다. 물론 시아버님의 신앙심은 여전하시지만, 삼촌이 신앙적으로 같지 않다고 해서 내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리신 것 같다. 그렇게 형님과 꾸준히 연락을 해오다 이번에 부고 소식을 전해 듣고 울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을 봤다. ㅠㅠ 헤어짐은 언제나 슬픔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형과 재회를 할 기회를 주셨다. 그래서 마지막 가는 길은 아쉬움보다는 형에 대한 사랑으로 보낼 수 있었다.

 

 

오랜 서랍장에 묵혀 둔 일기장의 비밀 하나를 털어놓으니 속은 시원해진다. 하지만, 이 내용의 반기를 들 분도 있을 것이다.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가족을 배척할 수는 없다. 우리가 품어주지 않는데 어떻게 세상이 그들을 품어 주라고 말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해할 수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삶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이 큰 우주 속에는 각기 다른 사상과 이념으로 서로 싸우고 죽이기도 하면서 한 사람의 인격적으로 죽이는 테러범들이 너무 많다. 그들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 인격의 존엄을 무시하는 공격적 발언, 언어적 테러는 그들의 두 번 죽이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 이렇다고 강요할 필요는 없다. 다 생각이 같지 않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그는... 친절한 모습이다.

 

 

“You never really understand a person until you consider things from his point of view... Until you climb inside of his skin and walk around in it.” ("사물을 그의 관점에서 고려하기 전에는 결코 진정으로 사람을 이해할 수 없겠지... 네가 그의 피부 안쪽으로 기어올라 그 안에서 돌아다닐 때까지.")
 Harper Lee, To Kill a Mockingbird (앵무새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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