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탁모와 가온이(본명:유진).. 입양하기 전에 한국 이름이 서경식이였어요.
2001년도 4월 초순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필자의 가족은 아주 특별한 만남을 만나기 위해 한국 방문을 한 것입니다. 처음 도착한 장소는 사회아동복지 회관이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입양담당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그분이 그러십니다.
입양담당자: "위탁모와 아이가 지금 와 있어요. 지금 만나 보실래요?"
우리가족: "넵!"
이렇게 해서 우리의 특별한 만남이 시작 되었지요.. 우리 부부는 몇년을 기도를 하면서 상상 속에서 아이를 만났었고, 이런 기다림의 끝이라고 생각되는 그 날이 바로 오늘이였지요.
정말 설레임이 이런것일까요?
위탁모 등 뒤에 업혀 있는 가온이를 본 순간 눈물이 나오는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습니다. 제 눈을 도저히 의심치 않을 수 없었을만큼 입양할 아이는 너무나 건강하고 예쁜 아이였습니다. 얼굴에 볼도 통통하고 정말 잘 키워 주신 것 같았습니다. 위탁모를 위해 미국에서 준비한 조그마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 선물을 받으시자, 필자의 손을 덥석 잡으시면서 그럽니다.
위탁모:"우리 경식(가온이 입양당시 이름임)이 어머니 되실 분이군요? 한국인 엄마한테 입양 간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나: "네. 반가워요. 우리 아이를 잘 키워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위탁모: "우리 경식이 앞으로 커도 볼수 있는 날이 있을런지 모르겠군요. (눈물을 흘리시면서)"
위탁모는 계속해서 울고 계셨고, 한국인 엄마한테 입양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뛸듯이 기뻤다는 말에 덩달아 눈물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우리 아이를 키우면서 좋은 엄마를 만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까지 하셨다는 그분의 말씀에 ,또 한번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날 위탁모는 우유가방만 들고 나오셨습니다. 그분은 아직 가온이와 이별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우리 부부에께 부디 일주일만 더 우리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부탁까지 하셨만, 우리는 거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탁에 거절당한 위탁모는 집에 잠시 다녀오겠다면서 기다려 달라고 하셨어요.
시간이 지난후 위탁모는 가온이를 위한 마지막 한복 선물과 함께 따라 나온 친정 엄마 그리고 막내딸 까지 함께 나왔습니다. 그들은 아직 준비 되지 않은 이별에 대해서 너무나 아쉬워 했지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한켠이 아려 오기 시작했습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위탁모들은 이별을 할 때마다 자식하나를 다시 볼수 없는 먼곳으로 보내는 심정이라고 하는구나."
어린 가온이는 울면서 위탁모와 이별을 그렇게 아쉬워했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하루종일 울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요. 울다 지쳐서 잠들지 않으면 계속해서 울기 시작했던 가온이 였답니다. 우리가 키울 아이였지만, 너무 울고 하니 어떻게 달래야할지도 모르는 순간이 되고 말았어요. 오히려 키워 주신 위탁모께 미안한 마음까지 드는 순간이였지요.
차라리 위탁모께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더 드리고 아이를 만나고 했더라면 좋았을것을.. 그렇게 진행하지 못해서 미안했습니다., 어짜피 내 자식인데 몇일 밤을 위탁모와 함께 보낸다고 해서 그 상황이 바껴지는 것은 아니기에 순간 그렇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이를 받아 안고 달래는 모습을 지켜 보시던 위탁모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손으로 눈물을 계속해서 닦으시면서 그럽니다.
위탁모: "우리 경식이 잘 키워주세요." ㅠㅠ
나: "네 걱정마세요. 인연이 닿으면 꼭 만날 수 있을겁니다."
위탁모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부터 해서 그날 하루종일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필자가 달래어 보려 해도 도저히 달랠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 순간 눈을 맞추면 웁니다. 아마도 내가 위탁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생선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위탁모와 때어 놓았다는 사실에 더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모습을 보니 우리 아들이 평생을 걸쳐 울어야할 눈물을 오늘 하루에 다 쏟아 버리고 있는듯 했습니다.속으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 그래..울어라.. 이것으로 너의 잠시의 이별의 아픔을 이겨낼수 있다면.. " 우리 아들이 우는 모습을 보니 필자도 같이 울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모습을 지켜 본 남편은 아들과 함께 필자를 꼭 안아 주셨습니다.
산넘어 산이라는 말이 맞는것 같습니다. 대구에 사는 언니집으로 가야하는데.. 기차를 타면 계속 울텐데.. 어쩔수 없는 상황때문에 주위의 시선을 무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우리 아들은 계속 울어댑니다. 울음소리도 얼마나 울렁차던지요. 이것을 지켜 보시던 건너편 좌석에 앉아 계시던 아저씨가 참다 못해 한 마디 하십니다.
아저씨: "애 엄마 맞아요?
나: 네..
아저씨: 아니. 애 엄마가 애는 안달래고 뭘 하시는 겁니까?"
나: 죄송합니다. 우리 아이를 오늘 입양을 받았어요. 위탁모와 이별하는게 힘들어서 울고 있는겁니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양해를 구할께요.
아저씨: 아..눼..제가 오히려 죄송하네요.
사람들은 가온이가 입양 된 첫날이라는걸 알턱이 없었지요. 그래서 그 아저씨게 말했지요. 우리 아이를 입양을 한 첫날이라서 낯설고 해서 울고 있다고..그랬더니 주위에 많은 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은 엄마와 아들을 번갈아 쳐다 보시면서 안타까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지요. 이런 관경을 지켜 보던 어느 중년신사 한 분이 한 마디 하셨습니다.
"부디 잘 키워 주십시요.."
기차 안은 어느새 입양한 엄마와 아이를 위로 해주는 말과 더불어 아이를 주라면서 과자와 요쿠르트 내밀어 주시는 고마운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감동이 될 수 밖에 없었네요. 우리 민족의 피가 이렇게 찐하다는 것을 다시 체험하는 순간이기도 했고요. 그런 주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들은 계속 울었습니다.
대구에 도착하자, 언니 집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친정 언니의 얼굴을 보자, 또 울음보가 터졌습니다. 눈을 맞추다 보니 위탁모가 아닌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게 울 수 밖에요. 아무도 달랠수 없었던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루가 지나고 남편이 아들과 눈을 맞추면서 달래주니, 울음이 멈추었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파란눈의 남편이 신기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남편이 달래주는 방식이 더 좋았던 것일까요? 지금 돌이켜 보면 아마도 전자의 경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남편한테 잘 안기고 해서 무사히 일주일을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이제는 미국으로 돌아가야할 시간입니다. 또하나의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울면 어떡할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이런 나의 모습을 지켜 보던 친정언니는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바나나킥(지금도 가온이가 좋아하는 과자)을 건내 주면서 그럽니다.
친정언니: 넌..애도 둘이나 있는데. 왜 또 입양을 했니? 위탁모하고 생 이별을 시켜놓고 이건 정말 못 할 짓인것 같다.
나: 언니 마음 알아. 걱정이 되어서 그렇다는걸 말이야.
친정언니: 정말 키울수 있겠어?
나: 걱정마. 잘 키울께.
친정언니: 그래. 이왕 키울꺼면 훌륭한 사람으로 잘 키워라.
나: 응 언니. 고마워..
솔직히 언니 말을 들으니.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행기 안에서 우리 아들은 울지 않았습니다.
비행기 안은 우리 부부외에도 세 커플이 그날 한국에서 입양한 아이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는 중이였습니다. 그들의 입양한 아이들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비행기가 미국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 한국에서 입양된 아이들의 눈물어린 눈망울을 보니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가온이가 미국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간 곳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빅베어입니다. 그곳에는 시댁 식구들이 가온이 입양을 축하을 하기위해서 모였다고 합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시어머님이 반갑게 맞이 해주셨습니다. 시어머님은 가온이를 보시더니,아주 귀여워 하시고 좋아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우리 가온이를 방으로 데리고 가시더니. 아들 손을 잡고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어머님은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장래 모든것을 축복해주신다고 합니다. 앞으로 바르게, 건강하게, 자랄수 있도록 잘 키우라고 하십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지금은 먼 하늘나라 계신 우리 시어머님.. 그당시를 회고 해보면, 그날의 기억들이 애틋하게 필림의 한 장면처럼 다가옵니다.
유진이를 입양하고 난 삼개월이 지났을때 찍었던 사진입니다. 이때까지만해도 볼에 살이 탱탱한것이 참 예뻤습니다.
더디어 필자가 살고 있는 일리노이주 락포드에 도착했습니다. 아들은 아빠품을 안 떨어지려고 합니다. 아빠가 회사를 가야 하는데, 아빠를 붙들고 울어댑니다. 엄마한테는 오기 싫은 눈치입니다. 안아주고, 놀아주고 달래줬습니다. 그랬더니, 나를 한참을 쳐다 보고 또 쳐다 보더니 혼자서도 잘 놉니다.
3개월이 지난 후......비로서 엄마라는 소리를 가온이로부터 듣습니다.
"엄마.....................엄마................."
이말을 하는데, 눈물이 나오는것을 참느라 힘들었습니다.
현재 우리 가온이는 6살입니다.
그것에 대한 나의 대답은........"그래 같이 가자. ^^"
이 사진은 2005년도 사진이에요. YMCA수영장을 갔었는데, 우리 아들이 그럽니다. "엄마~~ 추워." 이 말을 하는 아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울수가 없었어요. 현재 나이는 8살입니다.
참고로 위의 글은 2007년 12월 17일 아침 8시 7분에 작성된 글이였으며, 아래의 사진과 글은 2017년 현재 상황을 업데이트를 한 내용을 올렸습니다.
남편이 육군 대령으로 승진한 날 막내 아들 16살이된 가온이는 아빠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마음으로는 아빠가 장군까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었지요. 그런 입양한 아빠의 영향을 받아서 앞으로 군인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인데, 쥬니어ROTC 프로그램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음악적으로도 소질이 있는 가온이는 바이올린과 드럼을 배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