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려운 상황이 닥칠때 자신이 비로서 변화 되어 감을 느낀다.
미국의 어느 마을에 사는 중년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몸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을 방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하늘이 내려 앉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의 몸에는 암이 자라고 있다고 병원에서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매일 병원을 오고 가면서 치료를 받고 약을 복용하고 또 더 많은 항생제를 복용하면서 아픈 나날을 지내야했습니다.
암의 전의가 급속도로 발전되면서 급기야는 음식물을 입에 넣을수 조차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식도 부분을 뚫어서 투브로 음식물을 넣고 먹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수술을 여러차례 하게 된 그의 얼굴은 이미 지그러 질 정도로 험악한 얼굴로 변해가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가 봐도 사람이라고 말을 하기엔 얼굴의 형태 조차 구분이 안 갈 정도였습니다. 예전의 그런 모습은 보기 힘들었고, 그런 모습을 바라 보는 가족들 마음도 아픔으로 가득했습니다. 몰래 울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살려고 많은 발버둥을 쳐 봤습니다. 그래도, 남는것은 허무한 마음 뿐이었고, 돌아 오는것은 살기 위해 치료를 받는 그런 날 뿐이었습니다.
절망에 나락에 도달한 그 사람은 어느날, 장성한 아릿다운 딸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정작 결혼식장을 딸의 손을 잡고 걸어 가야할 아빠였지만, 자신의 추한 모습에 딸이 실망하지 않을까 염려 되어 결혼식장에 가는 것을 거부를 했습니다.
"아빠의 이런 일그러진 모습으로 너의 결혼식장을 참여하면 모든 하객들이 그날의 기분을 다 망칠 것이 뻔하니, 아빠는 멀리서 너의 결혼식을 지켜 보마."
이런 말을 하는 그의 심정은 찌져지듯이 아팠습니다. 어쩔수 없는 일이였고, 암 때문에 이렇게 몸이 망가져서 이젠 딸아이 결혼식도 참여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가 작은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절망 가운데 그는 신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신의 존재함을 깨닫은 그 순간 부터 그의 삶은 불안 보다는 평안이 자리를 잡았고, 슬픔 보다는 기쁨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면서 기쁨과 평안을 얻은 그 사람은 말 합니다.
"내가 만약 이렇게 암으로 고생하고 몸이 망가지지 않고 예전의 모습으로 살아 갔다면 이런 평안과 기쁨은 누리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에 감사하고 이렇게라도 숨쉴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그분께 감사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때, 우리가 생각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또 예수 이야기야? 그건 지겹도록 들어서 이젠 듣기도 싫다. 아니면,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기꾼이야 라든가, 아니면, 예수 믿어야 돈이 나오냐, 뭐가 나오길래 그러는 거야? 아니면 정말 그런일이 일어 날수 있나?"
이런식의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현주소이고, 또한 기독교의 새로운 변화가 없는 이상은 이런 비난을 늘 받아 왔듯이, 그렇게 전염병처럼 받아 드리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끝은 한정 되어 있고, 영적인 세계는 무한정이라는 전제하에서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무지하고 그것에 대해서 알기를 거부합니다.
그저 오늘 하루 살아가는 일에 급급할뿐, 그러다 보니 그런 삶은 쫓기게 되고 늘 마음의 평화로움은 없고 기쁨도 없는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세상을 모든것을 준다 해도 기쁨과 평화를 누릴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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