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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 일상 에세이/창작소설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10-

by Deborah 2026. 5. 14.

 

한 사람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잔잔하고 평온하던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먹구름을 몰고 온 폭풍우처럼 뒤집혀 버렸다.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줄 알았던 감정은 허리케인처럼 거세게 몰아쳤고, 나는 그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10년 전, 하루아침에 내 세상은 진영으로 인해 달라졌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과 달랐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아니었다. 이제는 내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며, 세상과 맞서 싸우고 이겨내고 싶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한때는 그의 품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오랜 시간 애써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너무 쉽게 무너져 내렸다. 진영의 전화 한 통, 짧은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단단히 세워 두었던 감정들이 흔들렸다.

 

다정하지 않은 사무적인 말투조차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내 감정이 온통 그 사람에게 휘둘린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내 삶은 분명 내 것인데, 왜 마음은 자꾸만 그를 향해 흘러가는 걸까.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해 왔을 뿐이었다.

 

나는 문득 10년 전 우리가 왜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떠올렸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와의 만남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외면하려 애썼지만, 이미 시작된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지나가 버린 시간들은 결국 후회와 그리움으로 남아 내 마음을 붙들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도망쳤을까.

 

단지 친구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포기하고,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미련 같은 감정을 붙잡고 살아왔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무엇이 나를 올가미처럼 붙잡고 있었던 걸까.

 

나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정신과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의사는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 주었고, 늘 같은 약을 처방해 주었다. 하지만 그가 했던 말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려면 과거의 상처를 마주할 수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조차 힘들어질 겁니다.”

“무서워요. 옛날 일을 꺼내는 게…”

“두려워하지 말아요. 여긴 안전한 곳이니까.”

“…아직은 준비가 안 됐어요.”

“그럼 다음 상담 때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예전에 먹던 약으로 처방해 둘게요. 잠은 조금 편해질 거예요.”

“네… 다음에 뵐게요.”

 

그렇게 병원을 드나들던 날들도 있었지만, 요즘은 발길이 뜸해졌다.
문제는 여전히 내 마음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민석을 보면 안쓰러운 연민이 먼저 밀려왔고, 진영을 보면 사랑이 두려워 도망치고 싶은 마음부터 들었다.

이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혼자 고민하며 올려다본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맑았다.
저 푸른 하늘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그려 넣게 될까.

 

한참을 생각해 보아도 머릿속은 텅 빈 백지처럼 하얘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차마 보여 줄 수 없는 기억들.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지옥 같은 시간들.

 

혹시 그 상처가 앞으로 사랑하게 될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마음은 너무 아팠다.
진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아팠고, 민석에게 괜한 희망을 품게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하는 순간인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 답답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나는 오랜만에 정성껏 화장을 하고 새 옷을 꺼내 입었다.
괜히 거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진영은 예전처럼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10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는 이제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남자가 되어 있었다. 잘 재단된 슈트와 깔끔하게 정리된 눈썹, 날카롭고 반듯한 콧날까지.

 

소년 같던 모습은 사라지고, 성숙한 남자의 분위기가 그의 온몸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심장이 떨려 왔다.

진영은 조용히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

 

“혜리야. 안녕… 잘 왔어.”

나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이사님인데 반말은 좀 그렇지 않아?”

 

그는 피식 웃었다.

“난 싫은데. 그냥 예전처럼 해.”

오늘은 단단히 마음먹고 나온 사람 같았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의 분위기에 휩쓸리고 말았다.

“…알았어. 그동안 잘 지냈어?”

“응. 너 없는 동안 해외 유학도 다녀왔고, 지금은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

“그랬구나… 생각해 보니까 넌 네 집안 이야기 거의 안 했었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영은 천천히 시선을 내리며 낮게 말했다.

“…우리 엄마, 친엄마 아니야.”

순간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는 사실을.

 

무겁게 가라앉을 것 같던 공기 속에서도 우리의 대화는 이상할 만큼 부드럽게 이어졌다. 서로의 말을 조심스럽게 받아 주고, 눈빛으로 감정을 숨긴 채 웃고 있었다.

 

마치 오래 헤어져 있던 연인들처럼.

 

사랑은 말보다 먼저 공기 속에 번져 있었다.

 

우리는… 정말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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