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했던 내 마음에 다시 파도가 일었다.
한동안 잠잠해졌다고 믿었던 감정들이, 어느새 깊은 바다 밑에서 밀려 올라와 나를 삼키고 있었다.
그 파도의 중심에는 진영이 서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닿을 수 없는 사람처럼 멀게 느껴지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선명한 존재로.
눈을 뜨자 아침 햇살이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어젯밤 마음속을 휘몰아치던 폭풍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온한 아침이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흘러가고 있었다.
급하게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말리던 순간, 문득 민석과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곱창집에서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복잡해질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제는 회사에서 매일 얼굴을 봐야 한다는 현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 생각이 들자, 진영은 잠시 내 머릿속에서 밀려났다.
아… 모르겠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하자.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괜한 기대를 주는 건 더 잔인한 일이니까.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다정한 척하는 건 비겁한 일이었다.
나는 계속 스스로를 설득했다.
민석을 밀어내자.
그리고 내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자.
그 결론에 도달하자 지끈거리던 머리가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진영은 정말 시간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어제 이후로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 이게 맞는 거겠지.
하지만 출근과 동시에 다시 현실이 나를 붙잡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민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리님.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웃고 있는 얼굴을 보는데 오히려 내가 더 숨이 막혔다.
“응. 넌 잘 들어갔니?”
“넵. 저 칭찬해 주세요.”
“뭘?”
“전화하고 싶었는데 참았거든요.”
순간 가슴 한쪽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 말 한마디에 담긴 마음을 모를 만큼 나는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구나… 미안하다. 지금은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민석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억지로 웃었다.
“네. 일이 먼저죠. 기다리겠습니다.”
그 웃음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사실은 그를 아예 모른 척하려 했다.
선을 긋고, 차갑게 대하고, 더 이상 틈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나는 의도적으로 민석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피하기 시작했다.
점심도 다른 직원들과 먹었고, 회의가 끝나면 누구보다 먼저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런 작은 거리감조차 민석에게는 상처가 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청춘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이 너무 무거웠다.
젊음은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부신 시절이다.
그래서 더 바랐다.
그가 선택한 사람이 내가 아니기를.
하지만 곱창집에서 마주했던 그의 눈빛은 이미 너무 깊어져 있었다.
그 마음을 모른 척하는 건 이제 불가능했다.
만약 우리가 같은 나이였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어렸다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이었다면, 나도 그의 손을 잡아보려 했을까.
하지만 너무 늦었다.
모든 건 결국 타이밍이었다.
민석은 내 서른의 한복판에 너무 늦게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미안함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연민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자꾸 흔들렸다.
내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아니.
나는 아직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스무 살의 비참했던 기억들.
도망치고 싶었던 시간들.
아무렇지 않은 척 덮어두었던 상처들.
그 모든 것들이 여전히 내 안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진영은 한때 그런 나를 붙잡아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예전의 진영이 아니었다.
그가 정말 나 자체를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옛날의 나’를 사랑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아직도 환상 속의 혜리를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들자 마음이 서늘해졌다.
내 과거를 모두 알게 된다면,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민석은 또 어떨까.
그 순수한 눈빛으로 지금처럼 나를 바라봐줄 수 있을까.
나는 결국 아무 답도 찾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멈춰 있었다.
마치 시험지를 앞에 두고도 단 한 문제도 풀지 못한 학생처럼.
그때였다.
조용했던 책상 위로 전화벨이 울렸다.
진영이었다.
순간 심장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연락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여보세요.”
“네… 디자인 업무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너무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어딘가 일부러 감정을 걷어낸 사람처럼.
“아… 네. 수정할 부분이 있나요?”
“네. 직접 만나서 식사하면서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이 내 마음을 이상하게 건드렸다.
“민석 씨는 데리고 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왜죠?”
“프로젝트 담당은 혜리 씨니까요. 의견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정말 그 말뿐일까.
나는 쉽게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비서가 일정 전달드리겠습니다.”
“네.”
“그때 뵙죠.”
짧고 단정한 통화였다.
전화가 끊긴 뒤에도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이상했다.
그가 지나치게 사무적으로 굴수록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
예전 같았으면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줬을 텐데.
그 사소한 온기 하나조차 사라졌다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알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한마디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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