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초를 세듯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흐르는 시간 위에 서 있는 나는 자꾸만 그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
큰 키에 잘 다듬어진 비즈니스맨의 분위기,
날카로운 턱선과 오뚝한 콧날까지.
짧은 대화였지만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이제 다 끝난 일이야.
그냥 일일 뿐이야.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다시 볼 일도 없을 거야.’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려던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짧은 신호음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차가운 공기를 감싸며
따뜻한 온기처럼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 디자인을 맡게 된 민혜리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박진영입니다.”
“그런데 이사님… 이 번호 회사 번호가 아닌 것 같은데요?”
“네. 제 개인 번호 맞습니다.”
“… 개인적으로 연락할 일이 있으신가요?”
“왜요? 개인 번호는 별로입니까?”
“아니요. 일하는 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럼 됐네요.”
그의 여유로운 말투는 괜히 사람 마음을 흔들었다.
“개인 번호라 조금 부담돼서요.”
“아, 그렇군요.”
잠시 웃음 섞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부담 가지시라고 일부러 개인 번호 드린 겁니다.”
“……”
“민혜리 씨. 우리 언제 한번 만나야죠.”
“네? 그게 무슨…”
“하하. 디자인 이야기 하자는 겁니다.”
“…아.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을 해서요.”
“그럼 금요일에 뵙죠. 저녁 식사하면서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비서를 통해 장소와 시간 전달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긴 뒤에도 한동안 그의 목소리는 귓가에 남아 있었다.
진영의 목소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마치 내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미리 덫을 놓아둔 사람처럼.
괜히 불안해졌다.
‘이런 감정 다시 시작하기 싫은데…
이제 와서 10년 전 감정으로 뭘 하겠다는 거야.’
그래서 애써 마음을 눌렀다.
모른 척하자.
그냥 일만 하는 거야.
그 순간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남자 동료 한 명을 데리고 나가면 되지 않을까.
괜히 둘만의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도 막을 수 있고,
그게 나름의 보호막이 되어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부장님께 허락을 받고 신입으로 들어온 민석 씨를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내가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민석 씨는 들뜬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나도 사회생활을 오래 했다.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민석 씨는 분명 나에게 마음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일주일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는 애써 마음을 무시한 채 바쁘게 지냈고,
어느새 약속의 금요일이 다가와 있었다.
아침부터 평소보다 화장에 조금 더 신경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와서 내 마음을 들킨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새로 산 분홍빛 립스틱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나는 입술 위에 올렸던 색을 다시 지워냈다.
괜히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았다.
머리만 단정히 말리고, 평소보다 조금 신경 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밤공기는 묘하게 사람 마음을 간지럽혔다.
차갑지도,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은 온도.
어딘가 미묘하게 흔들리는 감정과 닮아 있었다.
약속 장소 입구에 도착하자 민석 씨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누나! 이제 오시는 거예요? 저 한참 기다렸어요.”
“누나라고 하지 말랬지. 대리님이라고 불러.”
“아, 맞다. 지금 회사 일 하는 중이죠?”
“그럼. 오늘 만날 분은 디자인 맡긴 회사의 박진영 이사님이야. 실수 없게 행동해.”
“네네. 저 접대 같은 거 잘합니다. 술도 대신 마셔드릴게요.”
“… 적당히 해. 내 술은 내가 알아서 마실 테니까.”
“걱정 마세요. 저 오늘 진짜 잘할 자신 있어요.”
“그래. 그럼 들어가자.”
“넵, 대리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진영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의자를 먼저 빼주었다.
늘 그랬다.
그는 언제나 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민석을 데리고 온 것이 잘못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진영은 민석의 존재를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대했다.
민석이 디자인 시안과 내부 상황을 설명해도 시선은 단 한 번도 그에게 향하지 않았다.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10년 전과 같았다.
그 시절, 나만 바라보던 박진영 그대로였다.
그 사실이 내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관계가 다시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미팅이 끝난 뒤였다.
인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하려던 순간, 진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석 씨는 먼저 들어가 주시겠습니까? 민혜리 씨와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민석은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짧게 시선을 주며 먼저 가 있으라는 뜻을 전했다.
https://deborah.tistory.com/406236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5-
그녀를 만나기 전, 내 세상은 흑백이었다.의미 없이 반복되는 하루와 감정 없는 시간들.그저 살아내는 것에 가까운 단조로운 일상이었다. 친구와 함께 입사한 회사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다. 햇
deborah.tistory.com
https://deborah.tistory.com/406232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4-
멈춰 있던 나와 그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안과 그리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뒤엉켜 자꾸 입 밖으로 흘러나오려 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삼켰다. 그 순간, 깨달았
deborah.tistory.com
https://deborah.tistory.com/406227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3-
그와 나눈 대화 중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말이 아니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보이지 않는 무언의 표현들이 그의 온몸을 통해 전해졌다. “나, 너 정말 좋아해.” 그는 그 말을 직접
deborah.tistory.com
https://deborah.tistory.com/406226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2-
그날 나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을까.그의 얼굴 표정은 또 어땠을까. 내 기억 속 그의 모습은, 단정하게 짧게 자른 곱슬머리와 멀대처럼 큰 키였다.시장 안의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치
deborah.tistory.com
https://deborah.tistory.com/406224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1-
그의 검은 테 안경 너머로 비치던 맑고 영롱한 눈빛이나를 향해 빛나듯 속삭이던 그 말은밤새도록 메아리처럼 남아, 결국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그랬다.그 순간, 젊음과 청춘이 흐
deborah.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