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곧 둘만 남겨진 공간.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웨이터가 다가오자 진영은 와인을 주문했다.
붉은 와인이 잔에 천천히 채워졌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아직 무엇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사람들처럼 조용히 잔을 들었다.
빈속에 마신 와인은 생각보다 빠르게 취기를 올렸다.
하지만 알코올조차 이 묘한 긴장감을 지우진 못했다.
진영은 집요할 만큼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민혜리 씨. 반가워요.”
“네. 박진영 이사님. 반갑습니다.”
“우리 만나보면 어때요?”
나는 피식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이사님. 전 여기 디자인 일 때문에 온 겁니다. 선 보러 온 게 아니에요.”
“민혜리 씨…”
그의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치 10년 전 그리움 속에 멈춰 있던 사람처럼.
“정말 우리… 모르는 사이 맞습니까?”
그 말에 숨이 잠시 막혔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묻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애써 표정을 굳혔다.
“옛날 일이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상관이죠? 전 이사님과 이런 만남 원하지 않습니다.”
순간 둘 사이로 깊은 침묵이 흘렀다.
차갑고 무거운 공기.
마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서로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게 맞는 거야.
속으로 몇 번이나 스스로를 설득하며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민석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금방 나오셨네요. 이사님이 오래 붙잡고 있을 것처럼 보여서 걱정했어요.”
“아니야. 그냥 아는 사람이랑 착각하신 것 같아.”
“아, 그렇구나. 누나, 이제 우리 밥 먹으러 가요.”
“또 누나래.”
“지금 회사 아니잖아요.”
나는 결국 작게 웃고 말았다.
“그래. 뭐 먹을래?”
“곱창 먹을까요?”
민석은 오늘따라 유난히 살갑게 굴었다.
마치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사람처럼.
그 시각,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
박진영.
그는 멀어져 가는 혜리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질투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결국 그는 단골 바(bar)로 향했다.
혼자 마시는 위스키는 쓰고 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혜리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진영은 빈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혜리의 은은한 향수 향이 아직도 옷깃 사이에 스며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진영은 천천히 셔츠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스쳐 지나간 순간은 짧았는데, 이상하게 그녀의 잔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 기억처럼.
지우려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감정처럼.
그는 낮게 숨을 내쉬며 위스키 잔을 기울였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갔지만 마음속 열기는 전혀 식지 않았다.
그 짧은 잔향조차 그의 심장을 흔들어 놓았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혜리를 다시 본 순간,
멈춰 있던 자신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10년 전 끝났다고 생각했던 감정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살아왔을 뿐.
민석이라는 남자가 자꾸 신경 쓰였다.
별것 아닌 후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혜리 옆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이상할 만큼 거슬렸다.
혜리는 여전히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차갑게 선을 긋고,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진영은 알고 있었다.
혜리 역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일부러 담담한 척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 나만 그 시간에 멈춰 있던 게 아니었군.”
낮게 중얼거린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결심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고.
10년 전처럼 멀리서 바라만 보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그 순간 휴대폰 화면이 밝게 빛났다.
오늘 전달받은 프로젝트 자료 메일.
그 화면 위에는 선명하게 그녀의 이름이 떠 있었다.
민혜리.
진영은 한참 동안 그 이름을 바라보다 천천히 웃었다.
“민혜리…”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집착,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이 짙게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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