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를 만나기 전, 내 세상은 흑백이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하루와 감정 없는 시간들.
그저 살아내는 것에 가까운 단조로운 일상이었다.
친구와 함께 입사한 회사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다.
햇살 아래 번지던 그녀의 미소는 눈부실 만큼 아름다웠고,
나는 그 미소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심장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내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나는 애써 감정을 숨겼다.
좋아한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친구를 향해 웃는 그녀를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그녀를 뒤로한 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순간 처음으로 희미한 희망이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그녀 앞에서의 나는 늘 서툴렀다.
말 한마디를 건네기 위해 수십 번을 망설였고,
작은 행동 하나에도 밤새 의미를 고민했다.
그녀는 조금씩 내 삶의 색을 바꾸고 있었다.
흑백뿐이던 세상을 무지갯빛으로 물들이듯.
매일 밤 그녀를 떠올리며 잠들었다.
내일은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혹시 그녀도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그 작은 기대만으로도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첫사랑이었다.
지금은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지만,
그때의 감정만큼은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십 년 동안 잊지 못했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아니에요. 전 모르는 분인데요.”
그 짧은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분명 그녀였다.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맞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를 알아보는 눈빛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날 이후 나는 무작정 기차역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다시 나타날까 싶어,
새벽이 올 때까지 홀로 기다렸다.
하지만 끝내 그녀는 오지 않았다.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나 역시 이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감정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왜 나는 아직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왜 그녀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흔들리는 걸까.
며칠 뒤, 비서를 통해 디자인 회사 관련 서류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했다.
스무 살의 어린 그녀가 아니었다.
이제는 서른이 되어,
업계에서도 인정받는 디자이너가 되어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 사람이
내가 사랑했던 바로 그 여자라는 사실에 한동안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곧바로 김대리를 불렀다.
“어제 디자인 맡긴 회사 기억하죠?”
“네, 이사님.”
“그 디자인 건은 제가 직접 맡겠습니다.”
김대리는 잠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원래라면 디자인 업무는 전부 그의 담당이었기 때문이다.
“이사님이 직접요…?”
“문제 있습니까?”
“… 아닙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그쪽 담당자 연락처는 제 개인 번호로 연결해 두세요.”
김대리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는 듯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밤이 찾아왔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다시 만나고도 놓쳐버린 사람.
한 번쯤은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다시 타오르고 있었다.
담배 끝에 붙은 불씨처럼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은 천천히, 그러나 뜨겁게 타들어갔다.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내가 지난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녀를 완전히 잊어본 적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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