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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 일상 에세이/창작소설

그를 사랑했던 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8-

by Deborah 2026. 5. 12.

 

진영을 혼자 남겨두고 돌아서는 길은 밤공기보다 더 차갑고 사늘했다.
마치 오래 묻어 두었던 감정들이 다시 깨어나 내 몸을 휘감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잊지 못했던 걸까.

 

속으로 애타게 그리워하던 사람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내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복잡하게 엉켜버린 생각들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석이었다.

 

민석은 나를 바라보며,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까운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이상할 만큼 멀게 느껴졌다.

 

그때 민석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누나…”

하지만 나는 듣지 못했다.
머릿속이 온통 진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누나.”

“아… 미안.”

“누나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 그래. 우리 곱창집 가기로 했었지.”

“네. 저 진짜 먹고 싶단 말이에요. 이 날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세요?”

 

곱창집 약속을 취소하려던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저렇게 해맑게 말하는 민석을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알았어. 가자.”

“네. 고마워요.”

 

민석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웃으며 생각했다.

 

적당히 밥만 먹고 헤어지자고.

곱창집 안은 시끌벅적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 곱창 3인분 주세요.”

“많이 먹고 싶어?”

“네. 오늘 제가 제대로 먹는 법 알려드릴게요.”

“하하. 그런 건 안 알려줘도 되거든?”

“누나는 너무 사회성이 없어요.”

“뭐? 내가 왜?”

“제가 회사 들어온 지 1년이 넘었는데, 오늘 처음 같이 밥 먹는 자리잖아요.”

“난 그냥 혼자가 편했어.”

민석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제 제가 있잖아요. 혼자 있으면 안 되죠.”

 

장난스럽게 던진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모른 척하려 애쓰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민석이 소주를 주문했다.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술은 왜 마셔. 그냥 가자. 내일 회사 가야 하잖아.”

“왜요. 오늘은 마시고 싶단 말이에요.”

결국 소주 한 병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민석은 혼자 몇 잔을 연달아 들이키더니
어느 순간 나를 조용히 바라봤다.

 

평소와는 다른 눈빛이었다.

“누나… 우리 솔직해져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가?”

“제 마음 말하려고요.”

“하지 마… 응? 하지 마.”

“왜요?”

나는 애써 그의 말을 끊었다.

 

“아줌마. 여기 계산 좀 해주세요.”

 

민석이 하려는 말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진영만 떠오르고 있었다.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이사와 대리.
누가 보면 웃기다고 할 관계.

 

그런데도.

10년 전의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이유를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오히려 민석이 가까워질수록,
진영에게 향하는 내 마음은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떠 있는 이름을 본 순간 심장이 흔들렸다.

진영이었다.

 

“여보세요?”

“혜리 씨?”

“아… 이사님.”

“잘 들어갔나 궁금해서 연락했어요.”

“이사님이 그런 걸 왜 신경 쓰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리야…”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왜 갑자기 반말하세요?”

 

“혜리야… 우리 이대로 끝나도 괜찮아?”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마음속에서는 다른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영아. 우리 헤어진 지 10년이야.
그런데도 아직 내가 좋아?

 

나는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영아… 아직도 내가 그렇게 좋아?”

“응.”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에는
10년 동안 숨겨왔던 그리움이 모두 담겨 있었다.

 

“처음 널 본 날부터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눈을 감자 오래된 기억들이 밀려왔다.

 

골목길을 함께 걷던 시간.

비 오는 날, 내 쪽으로 기울어지던 우산.

항상 먼저 웃으며 손 흔들어 주던 다정한 얼굴.

나는 애써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았다.

 

“진영아… 이건 아니야.”

“혜리야.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돼.”

그의 목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일주일만 생각해 줘.”

 

일주일.

그 시간이 우리를 또 멀어지게 만들지,

아니면 다시 이어주는 시간이 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흐릿한 안개 같았던 내 마음속에서
진영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 역시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너와 내가 다시 만나도 괜찮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한다면,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다시 사랑을 시작할 이유가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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