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영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삼키듯 몇 번 숨을 고르던 그는, 마침내 큰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우리 사이를 떠돌던 미묘한 공기가 조용히 흔들렸다.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들이 하나씩 깨어나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눌러 담긴 시간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서야 깨달았다.
이 사람은 내가 알던 진영이 아니었다는 것을.
반듯한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세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존재조차 모른 채 살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자신을 홀로 키워준 어머니마저 오랜 지병 끝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그제야 그는 존재조차 몰랐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그 집은 가족의 품이 아니라, 매일 숨을 죽이며 버텨야 하는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그가 한 마디씩 말을 꺼낼 때마다, 내 가슴 어딘가가 서늘하게 식어갔다.
그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나는 그가 아픈 사람이 되는 게 싫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실… 너와 헤어진 뒤에는 어머니 건강 때문에라도 널 찾아갈 여유가 없었어.”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난 전혀 몰랐어. 그때 네가 말이라도 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진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다고 달라졌을까.”
“그래도… 혼자보단 둘이 낫잖아.”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날 떠났잖아.
너 정말 잔인했어… 그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그 순간만큼은 내가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아팠다.
조금만 더 그의 곁에 있어줬더라면 어땠을까.
적어도 혼자 울게 두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이었다.
후회는 언제나 늦게 찾아왔다.
진영은 아버지 밑에서 살아온 시간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견제해야 했던 삶.
후계 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경쟁해야 했던 날들.
그는 그 모든 시간을 지옥 같았다고 말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지금까지 버텨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런데 그의 다음 말은 내 마음을 더 깊게 흔들어 놓았다.
“너 왜 내가 그런 수모를 다 견디면서 버틴 줄 알아?”
“…왜?”
그는 잠시 웃었다. 아주 쓸쓸한 얼굴이었다.
“다 너 때문이야, 혜리야.”
“….”
“내가 제대로 된 자리에 올라가면… 그땐 너한테 더 당당하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순간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랬구나…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잖아, 우리.”
그래도 난 널 잊은 적 없어.”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 헤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이제 더 묻지 않을게.”
짧은 침묵이 흘렀다.
가게 안 음악은 어수선하게 흘러나왔지만,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우리 둘만 시간이 멈춘 공간 안에 남겨진 기분이었다.
진영은 조용히 숨을 고르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혜리야.”
부드럽게 내려앉는 그의 목소리가 마음을 간지럽혔다.
“응.”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
“10년 전의 우리는 그때 그대로 추억으로 남겨두고,
지금의 너와 나로 다시 시작해보자.”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지만, 상처 입은 기억들은 아직도 내 안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힘들어… 시간을 좀 줘.”
진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1주일이면 될까?”
“…응.
1주일 뒤에 다시 보자.”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끝이 났다.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에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오늘의 만남은 단순한 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진영의 진짜 모습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다시 시작하자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예전의 우리가 아니라, 상처를 지나온 지금의 우리로 만나고 싶다고.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 깊숙한 곳을 흔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웠다.
과거의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기억들은 아직도 내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다시 꺼내 들기만 해도 아플 만큼.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디자인 일은 단지 핑계였는지도 몰랐다.
진영은 처음부터 내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우리는 정말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상처 입은 두 사람이 만나면 서로를 치유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더 깊은 상처만 남기게 되는 걸까.
마음은 자꾸 진영에게 향하고 있었지만, 믿음은 쉽게 따라오지 못했다.
갈등과 두려움, 그리고 과거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헤어지는 순간에도 진영은 끝까지 내 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눈빛과 작은 행동 하나까지도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혜리야… 난 아직도 너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그 감정이 마음을 흔들었다.
정말 다시 시작해도 괜찮은 걸까.
혹시 또 서로를 아프게 하게 되면 어쩌지.
하지만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는 결국 자신의 상처와 마주해야만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진영의 마지막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오래 닫혀 있던 문 앞에 다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내가 아직 그 문을 열 용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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