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시간 망설이던 끝에, 나는 결국 민석과의 만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저녁의 고요함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싸늘한 공기가 얼굴을 스칠 때마다 마음 깊숙한 곳까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어디론가 이끌리듯 천천히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도, 나는 이 감정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그 순간을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레스토랑 앞에 도착한 순간,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민석은 회사에 들어온 뒤 지난 1년 동안 한결같이 내 곁을 맴돌던 사람이었다.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답게 밝고 싱그러운 에너지를 가진 사람. 쉽게 다가갈 수 없을 것 같던 거리감을 허물어 준 것도 결국 그의 다정함이었다.
회식 자리에서는 내가 술을 무리해서 마시지 않도록 늘 신경 써 주었고, 누군가 억지로 술잔을 권하면 자연스럽게 대신 받아 주며 흑기사를 자처하곤 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숨기지도 않고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에서는 아주 작은 기대가 피어나고 있었다.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나 역시 그에게 마음을 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나를 압도했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조명과 화려한 꽃장식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곳곳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리지어가 놓여 있었다. 스쳐 지나갈 때마다 향긋한 꽃내음이 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질였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그곳에는 말끔한 슈트를 입은 민석이 서 있었다.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평소 회사에서 보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민석은 놀라울 만큼 눈에 띄게 잘생긴 남자였다. 마치 동화 속 어린 왕자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감히 욕심낼 수도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지금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민석이 부드럽게 말했다.
“누나, 어서 와요.”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당연하죠. 오늘은 공식적으로 누나랑 제 날이 되는 날인데.”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아직 널 남자로 보는 건 아니야.”
민석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웃더니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 주며 자리에 앉게 했다.
그 순간이었다.
문득 진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곳에는 진영이 없었다. 그런데도 마치 우리 사이 어딘가에 그의 그림자가 서 있는 기분이었다. 애써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며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민석이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우리 관계를 굳이 정의하지 말아요.”
“……”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천천히 가면 안 돼요?”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민석아…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왜요? 전 자신 있는데.”
“……”
“누나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그의 진심 어린 눈빛은 오히려 나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기쁨보다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다.
“누나.”
민석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한 번만 저 믿고 따라와 주면 안 돼요?”
나는 한참 동안 입술만 달싹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민석아… 너한테 아직 말 못 한 게 있어.”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레스토랑 안에 흐르던 음악이 묘하게 긴장된 공기를 감싸고 있었다.
“지금 말 안 해도 괜찮아요.”
“아니야. 꼭 말해야 하는 일이야.”
잠시 침묵하던 민석이 조용히 물었다.
“혹시… 박진영 이사님 때문이에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애써 숨겨 왔다고 생각했던 감정이었다. 그런데 민석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 사실 이사님이랑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야. 거의 10년 정도.”
민석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웃었다.
“전 또 뭐라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끝난 사이잖아요. 그렇죠?”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끝난 감정이라고 말하기엔 아직 마음 한구석이 너무 선명하게 아팠다.
그런 내 침묵을 바라보던 민석이 부드럽게 말했다.
“누나 마음이 어떤지 알아요. 기다릴게요.”
“……”
“오늘은 그냥 같이 맛있는 거 먹고, 웃으면서 보내요.”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 고맙다.”
“고맙긴요.”
민석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절대 포기 안 한다는 말이에요. 누나 부담 가지라고 하는 말인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하하… 알았어.”
능청스럽게 웃어 보이는 그의 배려가 이상할 만큼 마음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진영을 떠올리면 이것이 옳은 감정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끝난 사이인지,
아직 끝나지 않은 감정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서도 민석은 변함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닫혀 있는 마음의 문 앞에서 끝까지 기다리겠다는 사람처럼.
그런 그의 마음에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모든 것이 엉켜 있었다.
진영에 대한 감정조차 정리하지 못한 채 마주한 자리였기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순간만큼은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날의 공기와 온도,
그리고 민석의 눈빛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저녁으로 남아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레스토랑을 나와 돌아서는 길.
밤하늘 위로 떠오른 달빛이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졌다.
마치 아직 갈 곳을 잃은 내 마음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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