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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ing in America

내가 기억하는 외국 시어머니

by Deborah 2009. 8. 23.

내가 본 외국 시어머님에 대해서 말을 한다면 두 단어로 종합해서 말할 수 있을것 같다.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다.



내 아들이 한국여자와 결혼 했어요. 시리즈를 보신 분이라면 주인공인 시어머님이 한국 며느리 사랑이 대단하다는것을 느꼈을 것이다. 몇 주 전에 그분이 며느리와 함께 우리집을 다녀 가셨다. 외국 시어니와 한국에서 온지 3달 밖에 되지 않은 한국 며느리는 그렇게 다정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필자에게는 부러움이 되고 말았다. 외국 시어머니는 아들의 결혼 생활을 이야기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들은 평소에 야채와 생선을 싫어해요. 그런 아들이 한국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처가댁을 방문을 했어요.
물론 사돈댁은 우리 아들이 생선과 야채를 싫어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그런 우리 아들은 일년 동안 야채와 생선을 아무말 없이 먹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것이 사랑이 아니고 뭐겠어요. 제가 바꿀 수 없었던 식성도 변화를 시킨 우리 며느리가 참 고맙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분은 한국며느리 사랑이 침이 마르도록 하셨다. 이야기 하는 동안 한국며느리가 외국 생활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셨다. 한국며느리는 한국에서 영어학원 강사를 했기에, 읽고 쓰는 것에는 문제가 없단다. 단지, 생활 영어 발음이 신경 쓰인다고 했다. 다소곳한 모습이 예전에 내가 처음 우리 시어머님을 만났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했다.

시어머님은 수영을 좋아하셨다. 뒤뜰에는 이렇게 작은 수영장을 만들어 놓으셨다. 수영장 뒤편으로 보이는 선인장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까?


지금 부터 내가 처음 본 우리 시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철 없었던 25살 나이에 결혼을 했고, 그것도 외국 신랑을 만나서 했다. 주위의 많은 우려와 걱정 속에서 시작된 우리의 결혼은 시댁에서도 마찬가지 였다고한다. 우리 시어머님은 한국 며느리를 맞이 한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 하셨고, 빨리 보고 싶다고 까지 말했다. 그런 반면에 우리 시아버님은 남편의 결정에 대한 불만을 표시 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시작된 결혼은 미국 도착하자 마자 시댁으로 가서 인사를 드려야했다. 처음 만남인데, 시부모님이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면 어쩌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막상 시부모님을 만나보니, 너무나 좋으신 분들이였다.
 
처음 외국 생활의 첫 단추를 사막과도 같은 아리조나에서 시작했다. 시댁 뒤뜰에 있는 그네에 앉아서 바라 보는 선인장이 어쩌면 나와 같은 신세가 아닌가 하니,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바라 보던 시어머께서 말했다.

"그래. 울고 싶으면 울어라. 처음 외국 생활이라 부모님이 생각도 날꺼야. 내가 너라도 그랬을거야."
시어머니는 나를 꼭 안아 주셨다. 따스한 품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 시어머님의 따스함을 느끼는 순간에 마음 문을 여는 말을 하셨다.

"친정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으면 이제 부터 나를 친정 엄마로 생각하고 살아가렴. 그러면 조금은 도움이 될꺼야."

시어머니를 친정 엄마처럼 생각하라는 외국 시어머니의 말을 듣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부터 외국 남편과 문화가 다른 이곳에서 생활하고 살아 남기 위해서는 외국 시어머니를 친정 엄마처럼 의지 하면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당시로서는 그 말이 얼마나 필자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마치 사막에 버려진 나를 누군가 건져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분이 바로 나의 시어머셨다.

남편이 공개한 시어머님의 어린시절 사진은 사랑스럽다.


지금은 세월이 지나 14년째 외국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당시를 회고 할 때 떠오르는 시어머님은 언제나 기억 속에 자상하고 사랑을 많이 주셨던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신 분이셨다. 시어머님을 하늘나라로 보낸지 6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편과 나는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시어머님은 가난한 생활을 하셨지만, 그녀는 풍료로운 삶을 누리고 가셨다. 시어머님이 계신 그곳에는 눈도 오고 비도 올까?



시어머님은 남편이 고등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한 모범생이라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던 그 순간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자랑스런 아들이 한국여자와 결혼을 했는데도 실망치 않고, 며느리를 사랑으로 이끌어 내셨다. 무엇 보다도 남편 내조를 잘 하게끔 가르쳐 주신 분이기도 하다.


지금 세상에 없지만, 그래도 기억 건너편에서 바라 본 시어머님은 언제나 자상하고 사랑으로 모든것을 포옹하셨다. 지금도 생각난다. 그 때 뒤뜰 그네에 앉아서 나를 안아 주시고 품어 주셨던 그 순간이. 그 당시  포근하고 따뜻했던 그 분의 품이 그립다. 

지난날을 추억한다는 것은 그 때가 그립다는 뜻이다. 추억하는 순간은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하다. 현재를 함께 할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추억속에 있는 그들은 변화지 않는다. 변화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내가 변화고 있었다.



외국 시어머니의 좋은점
1.배려를 많이 해 주신다.
2. 제사등을 지내지 않아도 좋다.(외국인은 기독교라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3. 같이 살지 않아서 좋다.( 이건 좋고 나쁜점이 있지만, 아무래도 시어머님과 같이 살게되면 힘들죠.)
4. 시집살이가 없다. (이건 저의 경험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5. 우리 생활에 간섭을 하지 않으신다.(외국 시어머니는 개인적 사생활을 중요시 여깁니다.)
6. 자주 방문을 하지 않으신다. 일년에 한 번 정도 볼 수 있다.(미국은 지형상 땅이 워낙 넓어 놔서요. 다른 주에 살게 되면 자주 방문하기 힘들죠.)

외국 시어머니의 나쁜점
1. 배려는 너무 지나치게 해서 때로는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2. 언어 장벽이 있어 한국 시어머니 처럼 대화를 틀어 놓고 할 수 없다는 점이 있다.
3. 아들편을 많이 든다. (이건 동서양이나 마찬가지 인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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